2004년 10월 23일
삽질에도 품격이 있다
우리나라, 특히 우리나라 언론들이 노벨상 컴플렉스를 가지고 있는 것은 다들 느끼고 있을 거라 생각한다. 노벨상 좋지. 그런데 그게 탈 만 해서 타야 더 의미가 있는 거지, 전혀 여건도 안되고 주위환경도 척박한 곳에서 어느 순간 혜성처럼 나타난 천재 하나가 노벨상을 타는 거라면, 나름대로 국가적 경사이긴 하겠지만 실질적, 현실적으로 큰 의미는 없는 하나의 사건일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래의 조선일보 기사는, 최소한 "황우석 노벨상" 운운하는 선정적 찌라시 기사보다는 조금 더 발전했다 보지만, 여전히 삽질이다.
노벨 과학상에 근접한 한국인들
여전히 "노벨상 만들기 공학"이라는 개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마치 월드컵 축구 16강 진출을 위한 경우의 수를 따지듯이, 인용지수가 1천번이니 5천번이니, 그 중에서도 200번짜리 다섯개보다 1000개짜리 하나가 더 의미가 있느니, 미국에는 5천번대 과학자가 몇 명이고 우리나라는 몇 위고, 하는 지엽말단에 매달려서는, 노벨상 만들어봤자 그것은 흐름이 아닌 일과성 사건으로 그치고 말 뿐이다.
게다가 "한국 과학자의 수상 소식을 기대하던 사람들의 마음"이라니, 기대라는 말의 정의가 궁금하지만 "이번에 복권이 당첨되길 기대하는 마음이다"라는 정도 수준에서의 기대라면 그럴 만 하다고 해 줄 수도 있겠다. 물론 아무리 읽어도, "많은 사람들이 어느 정도는 현실적으로 기대해 볼 만 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는 전제를 하고 있다고 보여지지만 말이다. 안됐지만 2006년 독일 월드컵에서 한국이 우승하길 바라는 게 훨씬 더 확률이 높을 듯 싶다. -_- (현 상태로는 그렇다는 얘기다.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예상하지 못한 결과가 튀어나올 확률은 상존한다.) 소위 기자라는 인간들의 현실감각이 얼마나 떨어지나를 보여주는 문장이라 하겠다.
말이 나온 김에, 우리 사회는 총체적 무식에 시달리고 있다고 하는 게 나의 판단인데, 이것은 소위 엘리트 계층도 마찬가지여서, 오히려 겉보기 등급과 실제동급의 차이를 보자면 엘리트 계층이 일반인들에 비해 그 차이가 훨씬 크다. 그 중에서도 가장 무식이 통통 튀는 집단이 바로 기자 집단이다. 물론 자기 실력이 기사를 통해서 적나라하게 드러나게 되니까 더 눈에 띄는 면이 있다고 봐줄 순 있지만 말이다.
뭐, 수십 수백명의 국제 프로젝트에 한두명 끼어들어간 것을 크게 선전해 주는 거야 바람직할 수도 있다고 봐 주자. "한국인으로는 노벨상에 가장 근접한" 등의 표현으로 마치 한국인 중에 노벨상에 현실적으로 근접한 연구자들이 몇몇 있는 듯 암시하는 오바도 너그럽게 용서할 수 있다.
그러나 누가 조선일보 기자 아니랄까봐, 하고 싶은 말 슬쩍 끼워넣는 것은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
<조 박사는 “이제까지는 그렇다 치고 앞으로는 나눠 먹기식은 안된다. 미국이나 일본에 비해 턱없이 적은 연구비를 사이좋게 나눠먹다가는 한국 과학은 언제까지나 2류를 면치 못할 것이다. 대학도 세계적인 과학자 한 명을 데려오는 데 돈을 써야 자연 우수한 학생도 유치할 수 있다”고 말했다.>
"나눠먹기 식은 안된다"는 것이 하고 싶은 말이다. 나눠먹기는 평준화고 빨갱이고 포퓰리즘이고 조선일보가 반대하는 그 모든 것의 고갱이이고 2류, 3류로 떨어지는 첩경이다. 물론 일부 대학사회의 연구비 나눠먹기의 폐해를 부정할 생각도 없고, 선택과 집중이 더 효율적일 수도 있음을 부인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노벨상이 일회성 사건이 아니라 커다란 흐름 속에서 일어나는 결과물이 되도록 하기 위해선 한두명에게 몰아주는 "노벨상 공학" 보다는 전체 연구비 증액과 효율적이고 경쟁에 의거한 나눠먹기를 해야 할 것이다. 저변이 확대되어야 한다는 얘기다. 물론 조박사의 논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나, 연구비가 턱없이 적으면 연구비를 늘리는 방법을 생각해야지, 한곳에 몰빵하고 로또 대박이나 노려서야 되겠나. 문제의식은 좋았으나 대안제시에 문제가 있었다. 그리고 우수한 학생을 유치하고 싶으면, 세계적 과학자 한 명을 데려오는 것 보다 대학이나 국책연구소에서 돈 많이 주고 우수한 졸업생을 파격적인 조건에 채용하기 시작하는 게 훨씬 효과적일 거다.
<잘하는 놈 한둘이 좋은 거 몽땅 차지하기 놀이>가 조선일보가 원하는 사회임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그 속마음을 이렇게 잘 보이는 곳에 흘리는 건 삽질로서도 별로 품격이 없어보인다.
삽질에도 품격이 있다. 조선일보에 삽질 이상 바라는 게 없으니, 삽질을 하긴 하되 제발 좀 품격있게 해라.
# by | 2004/10/23 15:57 | 트랙백(3) | 덧글(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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